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돌아온 皇世孫
지난 89년 세상을 떠난 이방자(李方子)여사는 비운(悲運)의왕비였다.일본 황족으로 태어나 망국(亡國) 대한제국 황세자와 정략결혼한 희생자였다.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비운을 인정하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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격동기 60~64년 외교문서 공개
*영친왕 귀국 비운의 영친왕(英親王)이은(李垠)과 부인 이방자 여사의 영주귀국과 국적회복에 관한 기록도 이번에 함께 공개됐다.62년 당시 박정희(朴正熙)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의 지시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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격동기 60~64년 외교문서 공개
외무부가 16일 공개한 60년부터 64년까지의 외교문서 8백41권 10만여쪽에는 현대사의 중요 고비를 이루고 있는 4.19와 5.16이 포함돼 있다.특히 이승만(李承晩)대통령이 4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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조선궁궐 현판 151점 공개
창덕궁의 의풍각(창고의 일종)에 보관돼 오던 조선조의 궁궐. 전각등의 각종 현판 1백51점이 공개됐다. 서울시는 문화재관리국 李廷燮 문화재전문위원과 한림대 태동고전연구소 任昌淳소장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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대하정치소설 『적과 동지』
8·15해방에서 6·25로 이어지는 해방공간의 역사적 주체들을 총체적으로 다룬 대하정치소설이 출간됐다. 소설가 강준식씨(46)가 최근 한길사에서 펴낸 『적과 동지』전7권이 그것이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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광복절 특집|새 시각 역사 드라마 두편
매년 이맘때면 어김없이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새롭게 되살아나 역사의 아픔을 되씹게 하는 8·15. 광복 45주년을 맞아 올해 KBS·MBC 양방송사가 준비한 특집 드라마 2편이 예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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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방자 여사
운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. 16세가 되던 어느 여름날 아침, 대기에 있는 별장에서 무심히 집어든 신문에 이은 왕세자 전하의 사진과 자신의 사진이 나란히 있는 것을 보고 이방자 여사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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왕조의 비운 짊어진 파란의 일생
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였던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30일 타계함으로써 정략결혼까지 해야했던 한일간 얼룩진 역사의 한 장이 조용히 막을 내렸다. 20세기 초 한일합방이라는 거대한 역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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숙명대 50주년-학술 "향연"
여성 민족 사학의 명문 숙명여대 (총장 김옥렬)가 20일로 개교 50주년, 창학 82주년을 맞는다. 숙명여대는 이를 기념, 20일의 기념식 및 경축 공연을 비롯하여 『2000년대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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서화로 생계 해결한 개화파 망명객들|구한말 한-일 비사담긴 「스나가문고」…일서 1백년만에 첫 공개
【동경=최철주특파원】 구한말 격동기에 일본을 드나들었던 개화파·친일파·독립운동가들의 주요서화 및 자료들이 비장된지 1백여년만에 그 일부가 처음으로 공개돼 한일 사학계에 비상한 관심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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쓸쓸한 세모…병상의「마지막 상궁」|구호미로 투병하는 김명길 할머니
「마지막 상궁」-. 조선조의 영화와 비극을 한몸으로 산 순종비 윤씨외 시녀 김명길 할머니(92)가 다섯달째 병상에 누워 쓸쓸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. 병상을 지키는 사람은 역시 90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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잃어버린 36년3·1운동|발가자료가 새증언으로 밝히는 일제통지의 뒷무대
O…3·1운동은 종교계와 학교가 주체가 되어 선도했다. 총독부의 무단통치아래서 조직이라고는 종교단체와 학교뿐이었다. 모임은 네갈래였다. 하나는 천도교로 주역은 권동진·오세창·최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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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14)침략의 제물|발굴자료와 새증언으로 밝히는 일제통치의 뒷무대
조선왕실 최후의 사람들은 민족과 아픔을 함께 하지 못했다. 오히려 민족의 한을 깊게 만들기까지 했다. 그 표본이 영친왕으로 일컬어지는 최후의 왕세자 이은이다. 이은의 일본화 과정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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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5)-대한제국의 최후(5)
일본의 한국 병합 공작에 항쟁한 안중근 의사는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있다. 그는 을사조약을 강요했던 [이또]를 저격함으로써 민족의 독립의지를 내외에 시위했다. 그는 일본법정을 거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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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3555)-제79화 육사졸업생들(8)|계림회
필자가 일본 육사에 입학했을 때는 신입생 2천8백명에 2학년(58기)이 2천명이었다. 그 때는 태평양전쟁이 한참 확대되고 있어 초급장교가 많이 필요했다. 그래서 우리가 입학한 후에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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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3553)-제79화 육사졸업생들(6)=장창국
일본육사 27기에는 입학자중 2명이 탈락되어 김석원장군, 애국지사 이종혁선생, 채병덕장군 (전 참모총장)의 장인인 백홍석장군과 조선총독부 보도담당관으로 있으면서 언론 통제에 악명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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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3551) 제79화 제79화 육사졸업생들(4) 장창국
일본육사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짚고 넘어가려 한다. 내가 나온 학교라서가 아니다. 일본육사에 대해서 내가 잘알고있어 쓸거리가 많대서도 아니다. 많은 분들이 알고있고 이 글을 통해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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피해자의 상처를 다시 짓누르다니…|왜곡 일 교과서…그 배경과 대응책
일본의 새 역사교과서가 일제의 대한침략과 지배서 미화·왜곡시키고 일본각료들이 이를 옹호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해댐으로써 은 국민의 분노는 물론 국제적인 비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. 이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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성씨의 고향(10)|영월 엄씨
『위선피과 오소감심』-. 좋은 일을 하고도 화를 당한다면 달게 받겠다는 절규에 찬 경귀가 바로 엄문의 가헌이다. 엄가의 12세손 엄흥도가 어린 왕 단종에 바친 충절로 보복의 칼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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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3247)제75화 패션 50년(28)-한일친선 패션쇼
1957년 최초의 발표회를 가진 이래 나는 해마다 한두차례이상 패션쇼를 열어 왔었다. 그러나 1963년 초여름 서울과 동경에서 함께 가진 한일 친선 패션쇼 참가는 내개인에게는 물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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구수한 화술·풍류 갖춘 멋장이
고범 이서구 씨는 활달한 성격과 다방면에 걸친 재능으로 우리근대사에서 항상 첨단을 걸었고 노년까지 극작가로 활약한 정력가였다. 1899년 서울에서 태어나 20세에 신문기자를 시작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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황녀였기에…비운의「80평생」|고종의 서녀 이문용 여사의 사록을 들어보면
【전주=김수길·장남원 기자】삼단 섬들에 쑥색 고무신 한 켤레가 단정히 놓여있다. 이태조의 어진(어진=임금의 초상화)을 모신 경기전(전북 전주시 풍남동 3가102) 안뜨락 양지바른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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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2965)제71화 경기 80년
한일 합방이후 경기는 한국교육의 총본산으로 발돋움했다. 합방직후인 1910년 10월11일에는 수학원학생을 경성고보의 해당학년에 수용했다. 수학원은 원래 영친왕 이은의 교육을 담당하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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제71화 경기 80년사|일인교사 급증 수업시간에는 한국인 교사가|통역지원자 해마다 늘어 입시경쟁 치열
을사보호 조약 후 통감부의 정치와 더불어 1906년 8월초부터 궁내부와 내부이하 각부에 일본인 차관이 임명되어 이른바 차관정치가 실시되었다. 학부에도 일본인으로 차관이 임명되었다.